본문 바로가기
Let's read it!

멋진 신세계

by zivvon 2022. 1. 15.
목차 접기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 이덕형 옮김


「멋진 신세계」의 저자인 올더스 헉슬리는 문학과 철학 그리고 과학과 같은 분야의 폭 넓은 지식을 토대로 ‘삶’이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규명하려 애썼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의 궁극적 실체를 파헤치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던 그는 포드 기원 632년, 즉 2540년대가 배경인 ‘멋진 신세계’를 그려낸다.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달된 신세계 속에서 저자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공유 • 균등 • 안정은 신세계 속에서 최우선적인 가치로 여겨진다. 이에 따라 신세계에서의 인간은 부화소 속에서 탄생하여 각자 부여받은 계급으로 살아가고, 아무와 즉흥적인 사랑을 행하며, 슬픔과 우울 등의 감정을 모른 채 행복하게 살아간다. 2022년에 살고 있는 아무에게 질병과 가난으로부터 자유롭고, 혈연, 지연, 학연과 같은 사회 제도에 구속받지 않으며 행복한 감정만을 느끼시겠냐고 물으면 어느 누구나 “네.”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필자는 거의 확신한다. 필자 역시 고뇌와 번민이 없는 신세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저자가 그려낸 미래 사회는 가히 매력적이다.

 

존이 문명세계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오오, 멋진 신세계여!”라고 외쳤던 것처럼 우리가 신세계를 거시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자. 가까이서 봐도 역시나 신세계는 평화롭고 안정적이지만 이는 과학기술로 억눌러놓아 어쩔 수 없이 유지되는 상태에 그칠 수도 있다. 또한 존과 총통의 대화에서 개인의 자유와 감정이 억압됨을 엿볼 수 있듯이 극도로 발달된 과학기술에 인간의 고유한 가치를 상실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세계가 겉만 번지르르한, 사실은 죽어있는 암울한 사회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신세계의 구성원들은 과학기술의 지배 하에 무언가를 위해, 필자가 생각하기엔 신세계 속의 유토피아를 위해 열심히 굴러가는 톱니바퀴에 불과할 뿐이다. 과학의 힘에 굴복하여 인간성을 상실하고 도구로 전락하는 인간은 과연 ‘살아간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어떤 이들은 존이 내세운 ‘불행해질 권리’에 반해 인간성을 상실해도 행복하기만 한 신세계를 추구할 수도 있다. 여기서 행복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자 하지만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쉬이 무엇이 행복이고 무엇이 행복이 아닌지 논할 수 없다. 필자의 주관적인 행복을 정의하려해도 기쁘거나 즐거울 때의 감정을 행복으로 치환할 수 있는지 스스로도 의문이 든다. 하지만 ‘인간은 추구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다.’라는 파우스트의 말처럼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고뇌와 번민의 과정을 견뎌내야하는 등가교환의 법칙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무에서 오는 행복이 존재한다면 신세계가 아닌 현재의 사회에서도 모든 사람이 행복해야하기 때문에 신세계에서의 행복은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파생되는 것이 아닌 단순히 세뇌당한 ‘미지의 상태’라고 생각한다. 이는 곧 멋진 신세계가 사회로서의 기능이 정지된 ‘미지의’ 영역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멋진 신세계」를 읽으며 음산하기도 했고 어딘가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책 속에 등장했던 인공 부화소가 현대의 기술인 시험관 아기와 비슷하다 생각했고 나아가 멋진 신세계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멋진 신세계와 2022년 현재를 비교하기에는 다소 비약적일 수도 있지만, 주입식 교육을 받는 아이들 그리고 인공지능, 즉 AI 시대가 다가올수록 침해 받을 수 있는 인간의 고유한 권리와 사생활을 생각해본다면 멋진 신세계는 우리에게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일 수도 있다. 감히 추측해보건대 저자는 과학 그리고 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시대에 그 힘에 굴복해버린 인간의 모습을 예견하고, 우리에게 그 힘에 져버리지 말라고 또한 인간이기를 고집하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필자 역시도 우리 모두가 외관만 휘황찬란하게 갖춰진 ‘멋진 신세계’에 현혹되지 않기를 권고한다.